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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ards endlessly Moving Image

 

의뢰는 미래에 부치지만 승낙은 과거에서 기인한다. 박석민의 전시를 몇 번 보았고 그와 대화는 관람 횟수보다 많았다. 그래서 의뢰를 승낙했는데 이번 전시를 위한 그림들이 낯설어 당혹스럽다. 그는 평소 작업에 대한 몰이해나 과잉 해석을 경계해 왔다. 오해나 편향을 피하기 위해 그의 말만을 받아쓸 수도 없고 나의 판단으로만 내처 나아가기도 섣부를까 두렵다. 그가 찬 공을 드리블하듯 써본다. 오프사이드 반칙을 걱정한들 뭐할까.

 

***

 

그는 그림을 움직여 왔지만 이번 만큼 목표한 적 없었다.

그의 그림은 움직여 왔지만 이번 만큼 확연한 적 없었다.

 

두 개의 가시물에서부터 출발하자. 하나, 볼텍스(vortex) 이미지. 박석민은 “태양계가 우리은하의 중심부를 공전하는 시뮬레이션 영상‘을 보여줬다. 유려하고 영롱하게 나선형을 그려가는 태양계 행성의 유선 운동이었다. 흔히 아름다움에 매료되면 얼어붙기 마련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볼텍스 영상처럼 나도 함께 운동해야 한다. 그가 이 이미지를 내민 건 끊임없는 활성화를 위해서다. 유일한 고정값은, 변화한다는 그 변하지 않는 진실은 간직하고서 말이다. 둘, 플랜스테드 모빌. 검은 구(求)형들이 달린 ’대위법(counterpoint)’이란 이름이 붙은 모빌 운동을 언급했다. 기류에 따른 움직임과 빛의 산란을 드러내는 모빌을 지근에 두고 지켜보아 온 기쁨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에게 기쁨은 단지 감상에 그치지 않는다. 말하자면 플랜스테드 모빌은 기쁨의 ‘대상’에 닻 내려져 있지 않다. 그는 대위법을 짧게 그러나 신중하게 거론했다. 대위법에서는 독립과 결합 중 그 무엇도 결여되선 안된다. 분명한 것은 이들 사이의 독립과 관계항이 필수란 것이다. 한 번 더 강조하는 바는 변화한다는 그 변하지 않는 진실.

 

이쯤에서 박석민의 작품으로 향한다. 〈Vortex-Counterpoint〉 연작의 배경은 위와 같다. 그는 바라보는 사람도 움직이고 대상도 움직이는 그런 이미지를 좇는다. 이를 위해 경험의 차원에서 답을 구했다. “나도 움직이고 대상도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빛이나 형상들이 진행하다 굴절이 발생”하는 순간이 분명 있다. 예컨대 “이동하는 차가 한 번 덜컹하면 빛의 움직임도 덜컹하는 순간” 말이다. 단적으로 〈Milky route 012〉(2022)가 질서의 유지 중에 돌연 찾아오는 그 순간에 가깝다. 〈Milky route 012〉는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라그랑주 포인트를 모색하는 와중에서 벌인 최종 일탈이자, 예고편이었다. 《ANGEL TAIL》(2022)에서의 〈Milky route 01-03〉(2022)도 이미지의 연장에서 덜컹 순간 잡아끈 포착이 드러났다. 혹은 그 반대일지 모른다. 포착 순간에 대한 연장일 수도 있는데, 관건은 대척으로 향하는 계수(係數) 조정하기다. 〈Milky route〉로부터 오늘의 전시를 예견했다 하더라도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는 변별점은 위치 선점이다. 앞선 작업들에서 박석민의 위치는 메타인지적 관찰자에 가까웠다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Vortex-Counterpoint〉 연작은 그도 움직이고 그림도 움직이는 그런 이미지 생산에 가까워 보인다.

 

움직임에 대한 단서는 《설탕을 녹인 공기》(2020)의 모퉁이에서 찾을 수 있다. 박석민은 전시 공간 해석에 까다롭다. 전시 공학의 답보는 작가로서의 방만함이다. 《설탕을 녹인 공기》에서 처리한 모서리의 라운딩은 장식 아닌 신체 움직임을 위한 유도다. 그에게 전시 공간은 작품 작품이 놓이는 물리적 지지체 이상으로 작품과 유기적이어야만 한다. 여백도 마찬가지다. 전시 공간에서 여백은 작품이 놓이지 않은 빈 공간이 아닌, 의도와 계산이 포함된 해석에서 비롯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 디스플레이 사진도 그 공간에서의 벡터값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에겐 실패에 가깝다. 물론 혹자는 그림이 이토록 까다로울 필요가 있나, 화면만으로도 충전된 의미를 담보해야하지 않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박석민의 작업은 그림 일반의 경계에서 미세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운신해 왔다. 그에게 그림은 세계가 멈춰서 고요해진 일순간의 평면이 아니다. 이번 전시작 중 〈Vortex-Counterpoint 001-003〉 연작이 운동감을 다루는 물리적·지각적 이미지에 대한 동기화에 가깝다면 〈Vortex-Counterpoint 05〉는 걷잡을 수 없는 고양된 운동 상태 한 가운데에 자신도 관객도 던져두고 있는 듯하다.

 

그의 그림 속 도상의 내용이나 이름을 파편적으로 묻는다 해도 그로서는 자기 그림에 내용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낱낱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해서 추상화인 건 또 아니다. “추상이면 애초에 추상적인 사고로 출발한다”는 입장이 명확하다. 비록 외형적 형태가 추상으로 보일지라도 그에겐 시각 경험에서 건진 그 무엇이다. 볼텍스 이미지가 그에게로 홀연 내리박혔지만 이때 우주는 물리학적 우주로 추종할 세계가 아닌, 내적으로 번안된 형상이다. 형상이라고 부를 때도 그 형상은 의욕으로 그러모은 형상이 아니다. 그는 한밤 저수지에서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물가에 갔는데 거기에는 돌도, 사람도, 흙도 있는 가운데 어느 순간 형상으로서는 무의미해지는 시각적 경험의 상태가 발생한다. 이런 시각적 경험의 상태가 필경 그만의 것은 아닐테다. 멍하게 볼 수밖에 없는 그런 “멍때림.” 명상이나 관조와 같은 정제된 개념을 기어이 무르고서 멍때림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경계가 어질러지고 뒤섞이는 경험은 시각적 경험 이상으로 물질과 관념이 뒤엉켜서 우리 안에 침잠한다. “물질을 비물질처럼 그리고 비물질을 물질처럼 그리는” 조정의 생리를 바탕으로 〈Vortex-Counterpoint〉, 〈Old Present〉, 〈Dark Mining〉 연작이 돌출됐다. 이런 설명도 낯설 그림들에 도움이 될지 미지수이긴 하다.

 

〈Vortex-Counterpoint 05〉로 다시 돌아가서, 8월 하얀 패널들만 가득하던 작업실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중간 과정을 지켜볼 수 있던 작품이 이것이었다. 친화력이 있는 부분은 저 깊은 한 점에서부터 파상을 이루는 소용돌이였고 둥근 구체들은 각각의 자리에 윤곽만 정해져 있었다. 표면 질감이 불균질한 비정형들이 배치되어 있는 와중에 부분적으로 그림의 완성과 미완성 부분을 짚어내며 설명이 이어졌다. 두 달 뒤 재방문에서 이제 완성에 가까운 작품이라 말할 때에는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콤파스의 미끄러짐이 낳은 원의 자리 배치, 옆으로 누인 물의 이미지, 광택과 투명도를 만드는 젤과 시멘트 재질의 이접을 보며 의미의 종합을 꿈꾸기란 요원했다. 그와 나 사이에 몰이해가 벌어지고 있나 고민의 와중에서도 분명한 믿음은 나누었던 것 같다. 그림의 레이어를 거듭 쌓아갈 때 시간의 경과에 순응하지 않고 미디엄 사이에 물감층을 붙잡아 두려는 의욕은 충분히 전이됐다. 다시 작품을 보았을 때 그림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작업 패턴에 제동을 걸어왔는데 이는 영리한 전략이라기보다 생득적 행동 패턴에 가까워 보인다. 오늘의 낯섦은 문제가 아니다. 변화한다는 변하지 않는 진실에 입각한다면 말이다. 이 정도를 헤아려야 〈Old Present〉와 〈Dark Mining〉 연작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다.

박석민은 〈Old Present〉 연작을 위해 준비한 하얀 패널들을 가리키며 이번 그림 같은 경우는 전반적으로 위아래 구분이 없는 조형을 시도하겠다고 말했는데 실로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패널을 보면서도 미래가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인물석고상의 외곽만을 이차원적으로 따온 것 같은 여러 패널들을 보니 그 위에 어떤 방식의 표현이 얹힌다고 해도 인물상의 환영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예측했다. 이 굴레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리고 그때 자유는 지각심리학을 어떤 방식으로 배격할 수 있는가 궁금했다. 시각적 결과물을 보았을 때 인물 패널에 결부된 원뿔형의 볼텍스 이미지에는 소위 박석민 작업을 떠올릴 때 동시에 연상되는 에어브러쉬 기법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점진적 그라데이션으로 매끈하게 처리하던 기존의 방식에 미디엄 두께가 결부되어 환영을 끊임없이 중지시키고 만다. “빛의 난반사”는 이 물질 덩어리로 인해 필연이 되는데 여기서 선후 관계는 조작되고 통제되었다. 물론 조작과 통제조차 가역반응(可逆反應)이다. 정반응과 역반응은 동시에 일어난다.

 

〈Dark Mining〉 연작은 한층 더 나아갔다. 부조 형태로까지의 돌출인가 싶을 때엔 돌출과 동시에 침강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박석민은 광물 사금 채취와 연금술의 근접성을 지적했는데 나는 그 근접성이 〈Dark Mining〉로 기우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채취와 제련의 엄정함과 연금술이 지닌 비의(秘儀)가 들러붙은 상상의 지대가 여기일까 짐작한다. 〈Mining depth〉(2022)로부터의 연장임을 힌트로 주었기 때문에 깊이감을 향한 도전이자 충동일까 싶을 때에 〈Dark Mining〉 연작의 강한 물질성은 휘발된다. 물질과 비물질이 엉긴, 마치 기억의 기묘한 지대를 건드리는데 이럴 때 도드라지는 물질은 훼방의 요소이자 이미지 해방의 국면을 여는 버튼으로 작동한다. 분할된 전시 공간에서 맞붙는 〈Old Present 07〉과 〈Relachio 01-04〉로 인해 인물의 간섭을 지워야만 하는 과제와 풍경화의 잔상을 거두어 들여야하는 과제가 중첩된다. 마치 번개가 떨어지는 것 같은 “풍경화적인 느낌”은 밝혔으나 그래서 풍경화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니라고 답하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응수할 듯하다. 가상(假像)을 말하지만 분명 기억의 실마리와의 접점은 마련되어 있는 그림들 앞에서, 말은 만용일지 모른다.

 

***

 

그를 이해하기 위해, 나를 점검하기 위해 박석민의 전작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내가 본 몇 번의 전시보다 오래전부터인 그의 궤적을 살피며 가장 익숙하다고 여겼던 그의 그림이 오히려 외전(外傳)같다고 느껴지는 상태로 선회했다. 그도 움직이고 그림도 움직이는 이미지를 두고서 왜 나는 상수(常數)로 머물려고 했을까. 그와 나눈 대화는 임사체험에까지 이른 적 있다. 그는 “신이 만약 있다면 그 어떤 신의 대리인으로서 당신한테 가장 익숙한 사람을 너한테 보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극단적 환각에 가까울지 모를 순간에도 세계 감각, 경험, 기억은 지속된다는 믿음. 잔상은 파편이나 나름의 정합성을 다시 구축하며 움직인다. 또한 움직임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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