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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포인트

Lagrangian Point

글_

박석민 Seok Min Park

지근욱 Keun Wook Ji

바라봄의 바깥을 상상하는 회화

Painting Imagining Beyond the Gaze

글_

박미란 Park Mi-ran

미술 이론, 학고재 기획실장

Art theory, Director at Hakgojae Gallery

아날로그 앰비언트 스프레이

Analogue Ambient Spray

글_

황윤중 Hwang Yoon-jung

자유기고가

Freelance Writer

멀어짐으로, 마침내 비근해지는

Finally Becoming Familiar by Growing Distant

글_

조현아 Hyunah Cho

미술비평, 월간미술 기자

Art critic, Monthly Art editor

확장된 장에서의 회화

Painting in an Expanded Domain

글_

장진택 Jintaeg Jang

큐레이터

Curator

플래시백: 무엇같이 보이지 않게 된 기억

Flashback: Memory That No Longer Looks Like Anything

글_

추성아 Sungah Serena Choo

독립큐레이터

Independent Curator

트리비아

TRIVIA

글_

임보람 Lim Bo Ram

독립큐레이터

Independent Curator

MIMESIS AP4 : MINGLE-혼재

MIMESIS AP4: MINGLE

글_

정희라 Jeong Hee Ra

독립큐레이터

Independent Curator

전능회화

An Omnipotent Art

글_

김정현 Kim Jeong Hyun

미술비평

Art critic

멋진 신세계 : 재현되지 않은 얼룩들

Great New World : Unreproven Stains

글_

추성아 Sungah Serena Choo

독립큐레이터

Independent Curator

작가노트 : 그레이스

Artist Statement: GRACE

글_

박석민 Park Seok Min

값싼 광물을 값비싼 금으로 바꾸어 낼 수 있다고, 우리는 한때 그렇게 믿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러한 염원을 기초로 하는 근대 이전의 과학적이자 철학적인 학문을 우리는 연금술(alchemy)이라고 부른다. 연금술은 그 사전적 의미대로 금이 아닌 것으로 금을 만들고자 하는 당대의 도전이며 운동이었다. 그 경제학적 가치는 차치하더라도, 특정한 물질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것과 전혀 상관하지 않는 다른 물질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보통 허황하게 들리기 마련일 테다. 실제로 연금술은 현대 화학의 성립과 더불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최신의 현대 기술이 납을 금으로 만들 수 있다는 명제를 참으로 바꿔냈지만, 여전히 우리는 연금술을 미신적 학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의 눈으로 연금술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과학의 그것과는 상이한 의미를 갖는 새로운 맥락을 부여받을 수도 있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에 의하면, 본래 연금술은 계몽을 통해 인간을 곧 신의 지위로 승화할 수 있음을 은유하고자 인용되었다. 따라서 연금술은 일정한 일반적 규칙을 따르면서, 기술이나 학문 그리고 지식에 기초한 합리적 활동의 전반을 의미하는 테크네(techne)의 한 부문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생산 활동을 통해 영적으로 인간의 비합리적 계몽을 선도한다는 점에서, 이성과 감성을 양가적으로 점유하려는 예술(art)의 형상과 연금술은 꽤나 닮았다고도 볼 수 있다. 박석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일견 메타(meta)적인 입장으로 예술을 취하면서 그가 지향하는 미적 인지의 형식, 그 자체를 공유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그 시도를 행함에 있어 작가는 대상의 형상을 시간당 프레임으로 분할한 이미지 데이터와 유사한 방법으로 저장하거나, 동일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대상의 형상을 다면적으로 촬영하는 듯한 평면 작업을 지속해 왔다. 이와 같은 작가의 방법론을 통해 그는 대상을 원소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진실로 대상과 공감하기 위해서는 물질의 기본적인 단위 수준에서의 접근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박석민의 전시 «설탕을 녹인 공기»(통의동 보안여관 ART SPACE BOAN 2, 2020)는 그처럼 작가 자신의 태도를 작품에서 전시의 범위로 확장해 적용하면서, 동시에 자연스레 이를 연상케 하는 시공간적 여과 장치를 표면이라는 경계에 투사한다.     

 

작가의 내면과 직결하는 작업, 다소 생소한 이 예술적 형식 안에서, 주체이자 대상이기를 자처한 그의 의도를 따라서 전시를 구성하는 개별 작품들은 이제 기존의 전시 틀 안에서 당연하게 짊어지던 의미의 무게를 내려두고 일반적인 미적 서사에서 도맡았던 지위 역시도 담담히 내려놓는다. 그제서야 항상 멈추어 있기에 익숙했던 작업은 공간의 곡면 모서리를 휘돌며 그 움직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낯선 움직임은 각기 다른 평면 작품들이 전시와 기획이라는 거대한 텔로스(telos)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또는 새로운 (비)논리적 도식을 통해 작업과 전시 그리고 창작자와 관람자의 관계를 마련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전시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분명 각 작품들과 이를 창작한 작가이다. 하지만 그 총체적인 움직임은 최종적으로 이 전부를 아우르는 작업의 층위를 통해 나타나며, 창작자와 관람자는 작업의 나선형 동선과 함께 회전하면서 그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지워낸다. 이때 작업과 전시 그리고 작가와 관람자는 서로에게 끊임없는 작용의 조건이 되지만, 동시대 현대미술의 범주에서 보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서(emotion)의 단계에서 그것을 행하지 않는 방식을 작가가 마련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박석민이 제시하는 이 새로운 상호 관계 맺음의 형식은 도리어 사유적인 감각을 이미 전형화되어버린 무엇으로 규정하고, 정동(affect)의 그릇이자 몸체로 각각의 주체화된 미적 매체들을 바라본다. 이로써 작가는 그간 동시대의 미술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어떤 잔상이나 흔적으로부터 진실한 공감을 구한다.  

 

이렇듯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흐름으로부터, 혹은 그로부터 생성되는 순환과 반복, 진동과 파장, 운율과 호흡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평소의 시선으로 목격할 수 없었던 추상적인 입자들을 조명하거나, 관찰하고, 혹은 너무나도 자명해서 지나쳐버린 것을 돌이키거나 환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둥근 사각형으로 둘러쳐진 백색의 전시 공간, 이를 따르는 서로 다른 형태의 캔버스들, 연속과 분절을 이어가는 사이의 간극, 구상과 추상, 현실과 가상, 그 모든 복합체의 표면만을 내보이는 박석민의 작업은 이전에는 예술의 범주로 간주하지 않았던 부분을 보아야 하며, 그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가치로울 수 있는 의미를 우리에게 떠올린다. 전시에서 이토록 흐려져 버린 정의의 경계는 예술과 관련한 창작과 향유의 행위, 나아가 주체와 대상의 개념을 본질적으로 역전한다. 서로 무관한 분절을 통해 구축하는 상호 연관성의 표명과 부딪히거나 피하면서 다가서고 멀어져 버리는 유목(nomad)의 도상들이 형성하는 이합과 집산, 그리고 이 이율배반적 논리의 정연함에 대한 당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역전의 가능성에 기인한다.        

 

너와 나의 자리에서, 따로 또 같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낄 것인지,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지, 무엇을 느끼어 주기를 바라는지에 집중하는 박석민의 작업은 더는 무엇을 표상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그곳에서 또 다른 하나의 대상이 되기를 자처한다. 주체와 대상의 지위를 동시적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그 펼쳐진 회화의 장은, 또한 주체와 대상의 지위를 동시에 포기할 수 있는 회화의 장에 대한 논리적 가능성을 그것이 내재한다는 의미와도 유비할 수 있다. 그 순간 박석민의 작업은 지금까지 당연하게도 불가능했던, 그렇기에 절충의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소통이라는 영역의 경계를 흐려내며 절멸하는 시도와 파열하는 가능성의 차원에서 이를 확장한다. 그 새로운 공감의 창구를 열어내기 위해 작가가 행하는, 소위 다중 편집의 방법론은 오롯이 진실성의 가치만을 비추려 한다. 결국 에어 브러시의 흩뿌림이 이끌어낸 가벼운 두께 아래 감추어진 표면과 깊이, 일관성 뒤의 이면성, 부조화 사이의 조화, 부동과 유동에서의 거리와 방향성, 드러냄, 가림 그리고 겹쳐짐과 같은 숨겨진 다층의 레이어들은 물리 공학적인 비예술의 감각을 예술의 범주 안으로 안착시키면서도 예술의 위치에 관한 우리의 성찰을 근본적으로 돌이킨다. 

 

이처럼 박석민의 작업은 (기존의) 회화가 아닌 것과 (기존의 회화) 전시가 아닌 것의 교차점에서부터 회화인 것과 전시인 것의 교차점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며, 나아가 그러한 작가의 태도는 예술인 것과 예술이 아닌 것을 예술이거나 예술이 아닌 것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내가 박석민의 전시로부터 막연하게 연금술을 상기했던바 역시도 어쩌면 그로 인해 새로이 확장된 조건들, 그에 기인하고 있었으리라. 물로 설탕을 녹인다면, 만들어진 용액의 무게는 최초 사용한 용매의 그것과 같을 것이나 그 맛은 달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질을 용해하려 공기를 용매로 투여한다면, 그 물리적인 성질은 변하지 않을지언정 그것이 발산하는 감상의 생성물은 처음의 그것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박석민은 형이상학적인 예술적 실천을 통해 한 번 더, 또 다른 금의 가치를 정련한다. 그 가운데서, 모호하고 자의적인 감상의 단계 너머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만이 조우토록 할 진정한 상호 이해를 그는 비로소 명징하게 도출할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서 침전해 있었던 그것을 처음으로 맞닥뜨릴 시공은 언제나 지금 여기였다.    

Humanity once believed it could transform lead into gold. We called this belief, this pseudoscience and philosophy of the pre-modern longing for gold, “alchemy.” By definition, alchemy was the challenge of its time and a movement to turn things that are non-gold into gold. With the economic implications aside, the aspiration to chemically transform a particular substance into something totally unrelated may sound ludicrous to many. The advent of modern chemistry did in fact expose the fallacy of alchemy. Although the idea of turning lead into gold is technically no longer a fallacy thanks to the advances in technology, we still treat alchemy as a superstitious field of study. However, if we view alchemy from a philosophical perspective, we may grant a new context that differs from a scientific one.

 

Hermes Trismegistus referred to alchemy as a metaphor for elevating humankind to divine positions through enlightenment. As such, alchemy should be understood as a part of techne, the overall pursuit of rational activities based on technology, academics, and knowledge, bound by certain set of conventional rules. Furthermore, alchemy shares many similarities with art in that it strives to spiritually lead the non-rational enlightenment of humankind through production activities; much like art, alchemy attempts to occupy both the rational and emotional. In this light, Park Seok Min attempts to take a meta approach to art and thereby share the aesthetic recognition that he strives for and its format. In this attempt, Park has been saving his objects in image data spliced into time-based frames or similar formats. He has also continued to produce flat works that appear to capture multiple surfaces of the object existing within the same span of time. Through such methodology, Park recognizes his objects at the atomic level, emphasizing the need to approach the objects at their most fundamental levels in order to truthfully commune with them. Likewise, in «Melting a Lump Sugar»(BOAN 1942, 2020), Park expands his attitude from individual works to the entire exhibition while projecting the spatial-temporal filter on the boundary of surfaces to naturally evoke such outlook. 

 

This rather unfamiliar methodology wherein the artist attempts to bridge his works directly with his inner self has manifested into Park’s works in accordance with his deliberate attempts to be both the subject and the object. Unfettered from their orthodox places within the framework of conventional exhibitions, these works also somberly abandon the positions they once held in common aesthetic narratives. And with this, art that always felt so stationary finally began to swirl in motion around the rounded corners of the exhibition space. This unfamiliar movement demonstrates that each flat work has been liberated from the grand telos of exhibition and curation. It proves that a new (ir)rational schema has now defin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exhibition, artist, and the audience. Undoubtedly, each work and Park, the artist, is in motion in the exhibition. However, the overall movement ultimately manifests through the multiple layers across the whole exhibition, driving the artist and the audience to twirl along the spiral path and collapse the boundaries between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While the works, the exhibition, the artist, and the audience serve as each other’s conditions for reaction, it is interesting that Park provides for the abstinence from the emotional experience which many would say is standard in contemporary art. This new way of forming a mutual relationship in fact defines the thought process as something standardized, and views the aesthetic mediums as subjectified vessels or bodies of affectation. Therefore, Park elicits true empathy from the vestigial traces that never received significant recognition in contemporary art thus far.

 

What then, should we see in this stream that makes mobile what was stationary, or the resultant cycles and repetitions, vibrations and waves, and melody and breath? What meaning could come of shedding light on the abstract particulates that we had been otherwise unable to examine with our conventional line of sight? By observing them? By going back to what we may have missed or prompting a reminder about them? This white, rectangular exhibition space with rounded corners is filled with canvases of all shapes and sizes between which are gaps that either comprise continuity or segmentation. It is where the figurative and the abstract, reality and the virtual all exist yet are portrayed only on their surface. Yet in them, we are compelled to see the things which we previously did not consider art, and when we do see them, we find valuable meaning in them. Such obfuscated boundaries of definitions in Park’s exhibition fundamentally subvert the activities of creating and appreciating art, and furthermore, the notion of subject and object. This paradoxical coexistence of collision and evasion of the mutually interrelated segmentation, the assembly and departure of the nomadic iconography, and the rationality of the antinomic reasoning are justified due to the possibility of this subversion.

 

Focusing on what should be seen, felt, and given in each of our separate or collective places, Park’s works seek to become another object in their own right instead of mere mediums that represent something else. This domain of paintings which would simultaneously enable the works to serve as both the subjects and the objects may also be inclusive of the rational possibility of abandoning either status as the subject or object. In that moment, Park’s works obscures the boundary of communication which thus far had remained a domain of compromise, expanding into the domain of eradicated attempts and explosive possibilities. The multi-editing method that Park uses to open this new channel of empathy seeks to shed light solely on the value of truthfulness. Consequently, the multiple layers hidden beneath the airbrushed paint, the duality hidden behind monotony, the harmony between dissonance, the distance and direction between movement and fixation, revelation, hiding, and overlaying bring the non-artistic sensation of physics and engineering into the realm of art; at the same time, it posits a fundamental question at our long held perspective on the position of art.

 

As can be seen, Park’s works challenge us to reexamine the intersection between paintings and exhibitions by directing our eyes first to the non-paintings (conventionally speaking) and non-exhibitions (of conventional paintings). Moreover, this enables us to view non-art as art and vice versa. Such expansion of the domain of art present in Park’s works probably attributed to my association of his exhibition with alchemy. Dissolving sugar with water would make little difference in the resulting solution, but its taste will be very different. Likewise, introducing air as the solvent to dissolve a solute may keep its physical properties by change the product of the appreciation it emits. Likewise, Park’s metaphysical practice of his art refines the value of a new gold. There, only the determination to transcend beyond the ambiguous and arbitrary appreciation will encounter true mutual understanding. And that is what Park will ultimately reach with clarity. The spacetime wherein we will first encounter the sediments of the things between us has always been here and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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